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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중순인데도 요즘 시절은 절기조차 뒤죽박죽됐는지 한동안은 구름 낀 날씨라 낮도 우중충했고 기온이 뚝 떨어져 겨울이 거꾸로 오나 할 정도로 쌀쌀했다. 나는 다시 기침이 도져 한밤에도 거친 숨을 다스리느라 진땀깨나 흘리며 고생했다. 숲을 흔드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적막 강산에서 나 혼자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온몸이 경련으로 떨다 덜컥 숨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방 벽에다 크게 써둔 큰애 아파트 전화번호를 보며 전화를 걸까 말까 한 적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전화를 걸어야 되겠다 마음먹을 정도로 정신 온전하고 수족 움직일 수 있다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다급한 경우가 아닐 터이다. 예정된 죽음이 내일이라도 닥칠 순간이면 전화 따위를 걸 수도, 누구를 불러야 되겠다는 생각도 못할 테고, 의식과 몸이 한순간에 고목 등걸로 변할 게다. 전시 당시는 후방이라도 어느 한순간 말 한마디 실수로 허무하게 목숨이 날아갔다. 그해 유난히 춥던 십이월 초순, 군용 트럭 적재함에 실려 서울까지 내려온 노무자들은 노역 임무가 끝나자 용산에 있던 지, 처형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도 목숨이 붙어 있으려나 하며 불안한 아침을 맞기 일주일에 이르자, 찍혀 호명당해 나가면 그 길이 죽는 길이란 말이 돌았고 천씨와 김씨는 트럭 타고 임시 난민 대기소로 넘겨졌다. 초등학교는 교실마다 월남 난민으로 들어찼다. 예순 명이 넘는 장정은 별도로 수용되어 치안대 분실로 불려가 개별 성분 조사를 받았다. 밤이면 대여섯 명씩 불려나간 장정은 그날 밤을 넘겨 이튿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무자로 다시 징발됐는내려올 때 탈주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둘은 고향에서의 인공 시절, 뒤가 켕기는 구석이 있었고 청년노동자동맹에서 활동한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산 노동자두 빨갱이라구 죽여요?” 내가 묻자, “증거 될 만한 증명서나 증언 서줄 사람이 없는 이북 출신은 언젠가는 결국 빨갱이로 돌아선다며 죽여버린다지 않소” 하고 천씨가 성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인해전술로 쓸고 내려오는 중공군이 곧 서울까지 덮칠 거라며 치안대도 철수 준비를 서두르던 십이월 하순, 수용된 장정은 학교 우물에 처넣고 수류탄을 까넣는다, 새로 만들어진 국민방위대에 넘긴다는 말이 돌았다. 피난민들부터 남으로 도보 이송이 시작되던 어느 날 야밤, 천씨와 나는 죽기로 각오하고 철조망 개구멍으로 탈출했다. 그로부터 나는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정신을 잃은 경우까지 합쳐 세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럴 때마다 하늘의 도움인지 살아남았다. 서울 재수복 후 저동에서 천막 치고 다시 문을 연 영락교회는 목사가 동향 출신이라 교회에서 운영하는 난민구호소는 평안도 출신 난민이 둥지 삼기에 적당해서 주일날 그곳에 가면 한 끼를 때울 수 있었고 고향 말투가 귀 설지 않았다. 나는 전쟁 전 개천에 살 때도 개신교 신자였다며 교회에 부지런히 출석했고 가난한 자, 주린 자에게 복을 준다는 그리스도 말씀이 위안이 되었다. 나는 손쉬운 고물 수집으로 우선 일거리를 잡았다. 그 즈음, 명동 바닥에서 우연히 황점술과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불심검문에서 수상한 불온분자로 몰려 어느 손에 개죽음 당했을는지 몰랐다. 일제 때 개천역 헌병분소 끄나풀로 역전을 터 삼아 기세등등하게 설쳤던 황이 신분 보증을 서주었기에 나는 가까스로 합법적 난민 자격을 얻어 서울 체류 허가증을 손에 쥐었다. 서북청년단 사무실에서 그 증을 쥐니 나는 이제야 살았다 싶었다.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자 틀림없이 남한으로 피난 나왔을 가족을 본격적으로 찾기로 하고 서울에 있던 피난민 수용소부터 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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